3. 한국합기도 유술의 전승
합기유술은 1949년 그 이전에는 유(柔), 유술(柔術)이라 하여 청화원씨(淸和源氏)→갑비무전씨(甲斐武田氏)로 이어지는 원정의(源正義, 武田正義, 武田惣角; 다께다쇼오가쿠) 달인의 가문(家門)의 선대(先代)로부터 번외불출(幡外不出), 문외불출(門外不出) 무술(武術)로 가문 내(家門 內)에서만 비전(秘傳)되어 왔다. 1900년대 초에 들어와서 원정의(源正義;다께다쇼오가쿠) 달인이 이 무술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일반인에게 교습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는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이라 불렀다. 덕암 최용술 선생님에게 합기유술을 전수(傳授)한 원정의 달인의 무술은 고대의 한민족 고래 유(柔), 유술(柔術)이 원류(原流)이다.
일본의 대동류유술육방회(大東流柔術六方會)에서 펴낸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이라는 저서에 의하면, “대동류합기유술은 일본의 제56대 청화천황(淸和天皇, 서기858-876년)의 제6황태자인 정순친왕(貞純親王)이 창시자라고 한다. 정순친왕의 장남으로 청화원씨(淸和源氏)의 선조(先祖)인 원경기(源經基, 서기917~961년)→ 원만중(源滿仲, 서기913~997년)→ 원뢰신(源賴信, 서기968~1048년)으로 승계되어 원뢰의(源賴義, 서기998-1075년)의 제3남인 원의광(源義光, 서기1045-1127년)이 합기술과 기초를 만들었다”고 한다.
원뢰의(源賴義)의 아들인 원의가(源義家미나모도요시이에, 서기1041-1106년)는, 팔번태랑 원의가(八幡太郞 源義家)로 알려진 인물이다. 원의광(源義光, 서기1045~1127년)은 팔번태랑 원의가(八幡太郞 源義家)의 동생으로 세상에서는 신라삼랑 의광(新羅三郞 義光)이라고 불리워지며 상당한 인물이었다. 원의광(源義光)의 합기술(合氣術)은 원의광의 제2남 원의청(源義淸)에게 승계(承繼)되었다. 원의청(源義淸)은 갑비(甲斐)의 무전촌(武田村)에 살면서 갑비원(甲斐源)씨를 선조로 하는 무전씨(武田氏)가 되었다. 이후 합기술(合氣術)은 무전씨 가문(武田氏 家門)의 비전무예(秘傳武藝)로서 무전씨 가문에서 대대손손(代代孫孫) 전하여져왔다.<寺田精之, 1980.3. 30발행, 정술합기도>
원씨의 본은 청화원씨(淸和源氏) 또는 갑비원씨(甲斐源氏)라 한다. 원씨가 무전(武田)씨로 이어져 내려온다.
원정의(源正義, 武田正義, 武田惣角 다께다쇼오가쿠) 달인은 일본 제56대 청화천황가(淸和天皇家) 가문(家門)의 후예(後裔)이다. 청화천황(淸和天皇 세이와천황)은 청화원씨(淸和源氏)로 서기 858~876년(제위 19년)이다. 어명(御名)은 유인(惟仁)이며, 다른 이름(異名)은 수(水), 모제(毛帝), 소신(素慎)이다. 서기(AD)850년생으로 서기 880년(31세)에 졸했다. 아버지(父)는 문덕천황(文德天皇), 어머니(母)는 등원명자(藤原明子, 후지와라메이시)이다. 일본의 평안시대(平安時代) 초기 서기 814년, 52대 천황인 사가천황(嵯峨 天皇, 생몰 786-842년, 재위 809-823년)은 자신의 자녀 신(信), 홍(弘), 상(常), 명(明) 등을 왕적(王籍)에서 신적(臣籍)으로 바꾸어 이들에게 사성(賜姓)을 원씨(源氏)라고 내려 원씨(源氏)가 탄생하였다. 그 후 역대 황들은 이에 따랐다. 제56대 청화천황(淸和(세이와천황, 생몰 850-881년, 재위 858-876)의 제6황태자(皇太子)가 정순친왕(貞純親王, 사다스미)이며, 정순친왕의 장남이 원경기왕(源經基王, 미나모토노쯔네모토, 서기917~961년, 청화원씨)이며, 원경기왕의 아들이 원만중(源滿仲, 서기913-997년)이며, 원만중의 아들이 원뢰신(源賴信, 서기968-1048년)이고, 원뢰신(源賴信)의 아들이 원뢰의 (源賴義미나모도요리요시, 서기998-1075년)이다. 원의가(源義家)는 아들 원의친(源義親, 미나모도요시찌까 )과 원의국(源義國 미나모도요시꾸니)을 두었다. 원의친(源義親요시찌까)은 아들 원위의(源爲義)를 두었으며, 원위의(源爲義)의 아들이 원의조(源義朝)이고, 원의조의 아들이 원뢰조(源頼朝 미나모토요리토모)이다. 이 원뢰조(源頼朝)가 가마쿠라막부(鐮倉幕府, 서기1192-1333년)를 세운 미나모토요리토모(원뢰조, 源頼朝)이다. 가마쿠라막부(鐮倉幕府, 서기1192-1333년)를 세운 미나모토요리모토(源賴朝)와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서기 1338-1573년)의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 尊氏)계열은 세이와 겐지(淸和源氏청화원씨)가 그들의 조상이다. 또한 도꾸가와막부(德川幕府, 서기 1603-1867년)의 도쿠가와(德川)계열도 미나모토(源)씨가 조상으로 연결된다.
원뢰의(源賴義, 서기998-1075년)의 셋째 아들이 원의광源義光(미나모도요시미츠, 서기1045-1127년)인데, 新羅三郞(신라사부로;신라삼랑)이라고 불리며 팔번태랑 원의가(八幡太郞 源義家미나모도요시이에, 서기1041-1106년)의 동생이다. 원의광(源義光 미나모도요시미츠)은 아들 의업(源義業), 의청(源義淸) 및 성의(源盛義)를 두었다. 원의청(源義淸, 미나모토요시키요;武田冠者; 常陸武田氏)이 무전향(武田鄕)에 살면서 무전관자(武田冠者,다께다카자)라고 일컬어, 이 때부터 무전(武田,다께다)씨(氏)가 되었다. 원의청은 아들 원(무전)청광(淸光), 사광(師光)을 두었다. 무전청광 武田淸光(다께다(미나모토)기요미츠)은 아들 무전광장(武田光長), 신의(武田信義), 원광(武田遠光), 의정(武田義定), 청륭(武田淸隆), 장의(武田長義), 광의(武田光義), 엄존(武田嚴尊), 의행(武田義行), 의성(武田義成), 신청(武田信淸)을 두었다. 청화원씨가 갑비의 무전씨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다께다(武田)씨는 히타치국(常陸國: 지금은 勝田市이다)을 지배한 사다케(佐竹)씨와 함께 미나모도노 요시미스(源義光 <新羅三郞, 八幡太郞 源義家의 동생>)가 선조(先祖)이다.
요시미스(源義光)의 셋째아들인 요시키요(源義淸)가 나카강(那河江)의 북안(北岸)의 다께다향(武田鄕)에 살며 다께다카자(武田冠者) 요시키요(義淸)라 했다. 훗날 요시키요((源義淸)는 아들 기요미츠(源淸光)를 대리고 히타치(常陸)로 갔다가 가이(甲斐 갑비)로 옮긴 다음 가이 다께다씨(甲斐 武田氏)로 이어졌다.“요시키요(義淸) 부자(父子)가 가이(甲斐)로 옮기게 된 것은, 교토의 공가(公家)의 일기를 근거로 “12세기 초의 다께다향(武田鄕) 주변은 세력다툼이 격렬했으며 세력 확장에 모든 힘을 기울이던 신참(新參) 요시키요(義淸), 기요미츠(淸光) 부자(父子)의 지나친 세력 확장 움직임이 문제가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가이(甲斐)의 다께다씨(武田氏)가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源義光)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분명히 밝혀져 있던 사실이다. <朝日新聞 아사히신문. 김달수, 일본속의 한국문화 >]
갑비(甲斐)의 무전씨(武田氏)는 源義光(新羅三郞, 八幡太郞 源義家의 동생)으로부터 발상되었다(원의광(源義光)을 신라삼랑(新羅三郞)이라 하는 것과 팔번태랑 원의가(八幡太郞 源義家)에 대하여는 다음에 쓰기로 한다). 그리하여, 청화원씨는 무전신의(武田信義, 다께다노부요시) 대(代)에 와서 무전신의(武田信義)가 갑비무전씨(甲斐武田氏) 시조(始祖)가 되었다.
신의(武田信義)는 아들 충뢰(忠頼), 겸신(兼信), 유의(有義), 신광(信光)을 두었고, 무전신광((信光)으로부터 대(代)를 이어져 내려와서 제26대에 이르러 일본 전국시대 대명(大命)의 한사람인 무전신현(武田信玄, 다께다신겐)으로 이어진다.
무전신현(武田信玄, 다께다신겐)은 이름이 무전청신(武田晴信,서기1521-1573년<53>)이다. 이름은 청신(晴信)이며 그의 법명이 신현(信玄)이다. 일본 전국시대에 대명(大命;다이묘)중의 한사람으로 갑비(甲斐;가이, 현재의 지명은 山梨縣) 및 신농(信濃; 시나노, 현재지명은 長野縣)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이었다. 武田家門의 무술인 다께다신겐가법 (武田信玄 家法)이 전승되고 있다.
무전청신(武田信玄,[晴信])은 아들 의신(義信), 신친(信親) 용방(龍芳), 신지(信之), 승뢰(勝頼), 성신(盛信), 신정(信貞), 신청(信淸) 및 딸 5명을 두었다.
무전승뢰(武田勝頼 다께다카스요리,서기1546-1582년<37>)는 아들인 무전신승(武田信勝;다께다노부카스)을 두었으며, 무전신승은 무전승뢰(카스요리의 아들로 16세에 아버지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깃발로 유명한 무전신현(武田信玄 다께다신겐, 청신晴信)은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대명(大命, 다이묘) 중의 한사람으로 가이(갑비甲斐)지방과 신농(信濃, 시나노)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이었다. 다께다신겐은 오다노부나가와 도꾸가와이에야스 통일전에서 도꾸가와이에야스 측의 조총부대에 맞서 기마부대로 싸워 패배하였으나 일본 역사에서 최고의 명장(名將)으로 알려져 있다. 무전승뢰(武田勝頼, 다께다카스요리)는 대대로 다께다 가문의 가신들이었던 사람들이 모반(배신을 음모)하여 “고야마(小山)”가 오다노부나가와 도쿠가와이에야스 연합군과 내통하여 1582년 연합군이 카스요리 군사의 마지막 요새였던 “고후성(高遠城)”을 포위하게 되었다. 이때 끝까지 이들 연합군에 저항하려 했던 무전승뢰(武田勝頼, 다께다카스요리)는 야마나시(山梨)현 텐모쿠(天目)산으로 피신했다. 이 텐모쿠산(天目山)에서 다께다카스요리(당시 나이 36세)는 운명을 다했다.
이 때 무전승뢰(武田勝頼, 다께다카스요리)의 아들 다께다노부카스(武田信勝)의 나이는 16세의 소년이었다. 카스요리가 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아들 노부카스는 다께다 가문의 제21대 당주에 취임하여 일본 천하는 다께다 가문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요리는 아들 노부카스와 함께 텐모쿠산에서 무사답게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신라사부로(신라삼랑 源義光)로부터 내려온 다께다 가문은 멸문하여 맥이 끊기게 된다.
전 후에 다께다신겐 가문의 다께다쿠츠니코, 다께다노부토모는 다께다 가문의 사람들을 이끌고 아이즈(會津)지방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다께다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다께다 가문(武田 家門)의 무전촌(武田村)이다. 이 다께다 가문에는 지금까지 다께다신겐가법(武田信玄家法)이라는 무예의 책이 전해지고 있다.
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은 근대 합기도의 원류이며, 무전가(武田家)의 33대 무전총우어문(武田惣右御門, 門內匠頭 (會津•武田家十余世))은 會津藩(아이즈번)내에서만 번외불출(藩外不出) 비밀무술(秘密武術)로 전승(傳承)되어온 대동류합기유술인 이 무술의 술기를 무전가(武田家)의 34대인 保科近悳호시나치카노리(西鄕頏母사이고다노모-講道館 四天王 중의 한사람)에게 전승하였다. 34대 西鄕頏母사이고다노모(保科近悳호시나치카노리)는 35대 武田惣角다께다쇼오가쿠(源正義)와 西鄕頏母사이고다노모(保科近悳호시나치카노리)의 양자인 西鄕四朗(사이고시로)에게 전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西鄕頏母(사이고다노모)는 강도관 사천왕의 한사람이었으며 강도관에서 물러난 후에 규우슈(九州)에서 대동숙(大東塾)을 창립하는데 관여하였으며 강도관의 유도에 대항해서 합기유술(合氣柔術)의 정수(精粹)의 대를 잇고(繼承)자 하였다.
이와 같이 源正義,(武田惣角 다께다쇼오가쿠, 武田正義 서기1860-1943년) 달인은 청화원씨를 선조로 하여 무전씨로 이러져 내려오는 힘 있는 사무라이 집안의 가르침을 계승한 다께다 신겐(武田信玄 1521-1573)가문의 사람이다. 덕암 최용술(崔龍術=吉田朝男)선생님은 세이와천황(청화천황)으로부터 35대인 스승 源正義,(武田惣角 다께다쇼오가쿠, 武田正義) 달인으로부터 대동류유술을 전수 받았던 것이다. 최용술 선생님은 35대 武田惣角다께다쇼오가쿠(源正義)로부터 유, 유술(합기유술)을 전수받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국내에서 전파하게 되었으며 제36대가 된다.
합기(合氣)라는 이름에 대하여, 원의광(源義光 요시미스)은 자연의 理氣와 인간의 氣를 합쳐서 집중하는 것이 병법의 極意라고 깨달아 이것을 合氣라고 이름 부쳤다고 한다. 또한 거미가 곤충을 잡는 동작을 보고 또 전사자를 해부하여 조사하고 연구하여 기술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며 대동관(大東館)에 살았었기 때문에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한편, 무전씨(武田氏) 가문의 충신 27대 무전국계武田國繼(다께다구니수구; 大東久之助(다이도오히사노스께)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최용술 선생님으로부터 유술수업을 받고 “한풀”을 지도하고 계시는 김정윤씨는 대동(大東)은 우리말 “한터”의 한자표현이며, 우리나라를 대동(大東)이라고 하는데서 대동류유술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청화원씨가에서는 야와라(柔)를 “手乞(데고이)”라는 말로 기록하였는데 “데고이”는 덕견이=태견의 일본어 발음이기도 하다. 이 “데고이”이라는 말을 일본의 고서에서 “手乞”이라 쓰고 읽기를 “데고이”라고 읽는다.
대동류합기유술은 한국(한나라)의 “합기술, 유술”이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민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천황가를 이룬 한민족의 무술로 천황가의 비전무술(秘傳武術)이었다. 천황가의 비전무술(秘傳武術)인 합기유술을 원정의(源正義)선생이 1900년 전후하여 세상에 전파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덕암 최용술(崔龍述 요시다아사오) 선생님은 일본에서도 1900년을 전후해서 원정의(源正義, 武田惣角, 武田正義) 달인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한 고래 한민족 고유의 비전무술인 합기유술(대동류합기유술)을 1913년경 원정의(源正義, 武田惣角, 武田正義)문하에 입문하여 전수받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덕암 최용술 선생님은 스승인 다께다쇼오가쿠(武田惣角, 源正義) 달인이 1943년 4월 25일에 북해도에서 서거하여 신라 삼랑의 대동류 합기유술 종가를 이어가게 되었다.
대동류합기유술은 우리 한민족 고래(古來)의 기합술(合氣術) 유술(柔術)로서 고대에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조정을 세운 우리 한민족에 의해 문외불출(門外不出), 번외불출(幡外不出)로 가문 내(家門 內)에서 비전(秘傳)해오던 것이었다. 가문(家門)이나 특정집단(特定集團)의 비전무술(秘傳武術)이 문외불출(門外不出)로 전승(傳承)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가문의 무술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적에게 나의 무술을 가르쳐준 것과 같다. 이것은 세력다툼이나 전쟁에서 자기가문이나 특정집단의 생존을 위한 방어를 하지 못하고 패배하게 되므로 그 가문의 생존이나 집단의 생존유지를 위해 가문 내에서만 비전(秘傳)하여 비밀스럽게 전승해왔던 것이다.
단기고사에 의하면, 고조선시대인 “기자조선(번한) 제38세 가색(可索: 번한 제66세)임금 3년(무신년(BC373년) 봄에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수련하는 사람) 노식(盧植)이 술서(術書) 40종류를 임금에게 바치면서 아뢰기를, 복기(伏氣), 태식(胎息), 잠신(潛神), 유술(柔術), 기합술(氣合術), 연단(鍊丹), 벽사(辟邪) 등 40여종 등의 술(術)이 모두 다 호신술이라 하였더니, 임금께서 그 것은 제왕이 할 일이 아니며 일시적으로 위급을 면하기 위한 술법(術法)이니 장군부(將軍府)에 보내어 참고하라고 하였다.”고 되어있다. <단기고사 기자조선 제38세> 이때부터 유술(柔術)과 기합술(合氣術)이라는 무술이 등장하였다.
우리 한민족의 고래 무술인 합기술 유술은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한민족이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천황가를 이루어 생존의 수단으로 비밀리에 전승하여 오다가 일본에서도 1900년대초에 와서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일합방시기인 당시 9세의 나이로 일본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덕암 최용술선생님은 12세때에 일본에서 우리 한민족이며 족내 비전무술의 달인인 원정의(源正義, 武田正義, 武田惣角; 다께다소오가쿠)를 운명적으로 만나 원정의 수행제자로 살아오면서 원정의 직제자가 됨으로서 우리 한민족의 고래로부터 내려온 고대 합기술 유술을 전수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되돌아오게 됨으로써 고대에 우리 한민족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 합기술 유술이 덕암 최용술선생님에 의해서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원정의는 회귀본주(回歸本主)라는 족자를 비밀리에 최용술 선생님에게 전하였다.
(한국합기도 합기유술 수도관 총관장 김홍철)